2022년 한국에서 제작한 드라마 장르의 작품입니다.
15세이상관람가 입니다.
“막을 수 있었잖아. 근데 왜 보고만 있었냐고”
오랜만에 복직한 형사 유진.
사건을 조사하던 중,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그 자취를 쫓는다.
같은 공간 다른 시간, 언젠가 마주쳤던 두 사람의 이야기.
우리는 모두 그 애를 만난 적이 있다.
다음 소희를 보면서 너무 기대를 많이 했는지 약간은 실망했어요.
정주리 / 감독
배두나 / 주연
김시은 / 주연
송요셉 / 출연
박윤희 / 출연
박우영 / 출연
김동하 / 스탭
김동하 / 스탭
정주리 / 스탭
김일연 / 스탭
[ PROLOGUE ]
“
누군가 다가갈 수 있다면, 어쩌면 달라질 수도 있다는 희망.
오직 그 희망을 생각해보며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
-정주리 감독-
[ ABOUT MOVIE ]
한국 영화 최초,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 선정
전 세계가 뜨겁게 공감한 한국 영화의 새로운 성취
정주리 감독과 배우 배두나가 <도희야>에 이어 재회한 작품으로 기대를 모은 <다음 소희>는 지난해 5월,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을 통해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프랑스비평가협회 소속 최고 평론가들이 참신하고 작품성 있는 영화를 엄선하는 비평가주간에 한국 영화 최초로 폐막작으로 선정되는 쾌거를 이뤄낸 것은 물론이고, 상영 후에는 7분간의 기립박수로 극장을 뜨겁게 달궜으며, 칸영화제로부터 “충격적이면서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작품!”이라는 극찬을 이끌어냈다.
이후, 북미 최대의 장르 영화제인 캐나다 판타지아국제영화제에서도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감독상과 관객상까지 2관왕을 기록하고, 프랑스 아미앵국제영화제에서도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관객상, 장편 특별 언급상, UPJV(Université de Picardie Jules Verne – 피카르디 쥘 베른 대학교) 학생 특별 언급상까지 3관왕을 휩쓸었으며, 도쿄필맥스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수상, 핑야오국제영화제 로베르토 로셀리니 최우수작품상 수상 등 현재까지도 눈부신 성과를 일구고 있다. 그 밖에도 BFI런던영화제, 겐트영화제, 홍콩아시안영화제, 하와이국제영화제, 테살로니키국제영화제, 레드씨영화제 등 해외 유수의 영화제로부터 연이은 러브콜을 받고 있는 <다음 소희>는 개봉 전부터 탄탄한 작품성을 입증하고 있는 것은 물론, 관객의 선택으로 수여되는 관객상까지 휩쓸며 흥행성을 겸비한 작품의 탄생을 예고한다.
이처럼 전 세계를 사로잡은 강렬한 영화의 탄생에 대해, 해외 유력 매체들과 평단은 “최고의 영화”(La Presse), “칸영화제의 숨은 보석!”(The Hollywood Reporter), “강렬하고, 깊고, 독보적이다!”(Movie Marker), “설득력 있는 연기, 견고한 연출”(Screen International) 등 뜨거운 찬사를 보냈다. 또한 <다음 소희>는 영화제를 통해 공개된 이후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 92%를 유지하고 있어, 성별과 국가, 연령대를 초월해 전 세계의 뜨거운 공감을 끌어내는 영화로 국내 관객들의 기대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다.
월드클래스 스타 배두나 & 칸의 샛별 김시은의 뜨거운 열연
2연속 칸영화제 입성, 정주리 감독의 예리한 각본 & 견고한 연출
세계 영화인들이 주목하는 정주리 감독은 제67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데뷔작 <도희야>에 이어 차기작 <다음 소희>까지 두 작품 연속 칸의 초청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정주리 감독은 <도희야>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을 비롯해 토론토국제영화제, 시카고국제영화제, 런던국제영화제 등에 초청되며 화제를 모았고, 국내에서 역시 백상예술대상과 부일영화상, 황금촬영상에서 신인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를 휩쓸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후 8년 만에 선보인 신작 <다음 소희>로 2연속 칸영화제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뤘을 뿐만 아니라, 섬세하면서도 힘 있는 연출과 명료한 스토리텔링, 그리고 강렬하고 깊은 여운을 선보이며 다시 한번 전 세계를 매료시켰다.
한편, 한국을 넘어 할리우드까지 글로벌한 활약을 펼치고 있는 연기파 배우 배두나는 <다음 소희>를 통해 정주리 감독과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추었다. 매 작품마다 신뢰감 있는 연기를 선보이며 믿고 보는 배우로 자리매김한 배두나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 드라마 등 경계 없는 활동을 펼치며 도전을 멈추지 않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독보적인 아우라와 입증된 연기력으로 다채로운 역할을 소화해 온 배두나는 <다음 소희>를 통해 오랜만에 복직한 형사 ‘유진’으로 변신, 또 한 번 배두나가 아니면 보여줄 수 없는 압도적인 연기로 강렬한 여운을 선사한다. 여기에 칸에서 화려한 데뷔 신고식을 치른 실력파 신예 배우 김시은이 가세해 빛나는 열연을 펼친다. 드라마 [멘탈코치 제갈길], [런 온] 등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찍고 <다음 소희>로 칸에서 장편 영화 데뷔 신고식을 치른 신예 김시은은 졸업을 앞두고 현장실습을 나간 평범한 고등학생 ‘소희’를 맡았다. 밝고 똑 부러지는 모습부터 점차 생기를 잃어가는 눈빛과 건조한 표정까지, 섬세하면서도 입체적인 연기를 선보인 김시은은 해외 평단으로부터 폭발적인 극찬을 끌어내며 ‘칸의 샛별’에 등극해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처럼 2연속 칸영화제에 입성하며 강렬한 작품으로 돌아온 정주리 감독의 탁월한 연출과 월드클래스 배우 배우나, 전 세계를 발칵 뒤집은 신예 김시은의 빛나는 호흡은 <다음 소희>로부터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 것이다.
곁에 있지만 몰랐던 모두의 이야기
2023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단 하나의 이름
2017년 1월, 전주에서 대기업 통신회사의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갔던 고등학생이 3개월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콜센터의 극심한 감정노동 실태와 열악한 업무환경이 드러났고,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우리는 제주도의 생수 공장에서, 여수의 요트 업체에서, 그 밖의 수많은 일터에서 또 다른 어린 이름들을 만나야 했다.
전주에서 일어난 콜센터 현장실습생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다음 소희>는 당찬 열여덟 고등학생 ‘소희’가 현장실습에 나가면서 겪게 되는 사건과 이를 조사하던 형사 ‘유진’이 같은 공간, 다른 시간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강렬한 이야기를 그린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학생 ‘소희’가 졸업을 앞두고 일을 시작하며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것들은 현장실습생에게조차 실적에 대한 압박을 가하며 정당한 대우를 하지 않는 부조리한 현실이다.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며 때로는 자존심을 지키고 때로는 친구를 위하던 ‘소희’는 모두가 전화기 너머 마주한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는 곳에서 점차 말을 잃고, 끝내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스스로 생을 접는다. 그리고 언젠가 아주 잠깐, ‘소희’와 스친 적 있는 형사 ‘유진’은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몸풀기로 맡게 된 이 사건을 쉽사리 마무리 짓지 못한다. 누구에게도 말해지지 않고,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이 고독이 낯설지 않아서 차마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진’은 ‘소희’가 다녀갔던 곳을 거꾸로 되짚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바라본 저수지의 반짝이는 윤슬을, 차가운 발등으로 스미던 가맥집 문틈의 한 줄기 햇살을 ‘소희’의 속도로 찬찬히 더듬는다. 그런 ‘유진’의 고요한 여정을 함께하며 슬퍼하고 분노하는 관객들은 점차 깨닫는다.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했던 ‘소희’의 죽음은, 사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 아이의 것이다. 잘 웃고, 쉽게 화내며, 지극히 행복해하던 우리 곁의 그 아이.
정주리 감독은 <다음 소희>를 통해 ‘소희’의 죽음과 그 이후에 느낄 ‘유진’의 무력감을 현실적으로 그린다. “‘소희’의 죽음을 의심의 여지 없이 다루었고, 그보다 더 큰 암담함으로 ‘유진’이 느꼈을 무력감을 다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다음에 올 아이들을 걱정하는 ‘유진’이라는 존재 자체가 남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존재가 ‘소희’를 잃은 우리가 여기에 주저앉지 않고 이 다음을 생각하게 하는 희망이 되길 바랐다” 이로써 <다음 소희>의 ‘다음’은 우리 곁의 수많은 ‘소희’를 위한 희망이 된다. 우리는 그 희망을, 절대 놓쳐선 안 될 것이다.
[ PRODUCTION NOTE ]
기획
정주리 감독이 제작사 트윈플러스파트너스㈜로부터 2017년 1월 전주에서 있었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의 시나리오와 연출을 맡았으면 한다는 제안을 받은 것은 2020년 말이었다. 당시 이 사건에 관한 어렴풋한 기억만 갖고 있던 정주리 감독은 2017년 3월에 방영했던 SBS 시사 교양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통신회사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갔다가 5개월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학생 사건’의 전말을 접했다. “그 프로그램을 보고 충격적이었던 것은 ‘왜 고등학생이 이런 곳에서 일을 하지?’라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야 했다. 무엇보다 이해하고 싶었다” ‘왜?’라는 질문은 정주리 감독의 마음 한구석에 의구심으로 남아있던 다른 일들에 대한 기억을 깨워냈다.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고치다가, 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가, 생수 공장에서 일하다가 스러진 어린 영혼들. 장소와 하는 일만 바뀌었을 뿐 사건의 본질은 동일했고, 이 모든 일들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정주리 감독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참혹한 사건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왜?’라는 질문에 좀처럼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이야기를 쓰고 완성해가는 과정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던 일을 내가 이해하고 결국 우리 사회 전체의 모습을 파악해가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도달한 온전한 이해의 끝에는 아무 상관없는 것 같았던 내가 실은 이러한 일들을 반복해서 일어나게 하는 전체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이 남았다”
선량하고 평범한 시민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이러한 사건이 가능하도록 만든 침묵의 방조자였을지도 모른다는 것. 이러한 깨달음은 정주리 감독으로 하여금 이 영화를 반드시 만들어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는 굳은 마음을 갖게 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업영화의 톤으로는 도저히 만들 수가 없었다. 오프닝과 엔딩, 전체적인 구성과 주요 사건들, 인물들, 그리고 <다음 소희>라는 제목이 담긴 40쪽짜리 트리트먼트를 손에 쥔 채 정주리 감독은 다시 제작사를 만났다. 그리고 기존 상업영화의 결과는 다르지만, 충분한 영화적 재미를 지닌 ‘진짜 이야기’를 만들겠다고 설득했다. “나는 영화의 힘을 믿는다. 비록 허구의 인물, 허구의 이야기가 될지라도 영화가 진실을 담으면 관객들의 마음속에 살아간다는 사실을 믿는다.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스스로의 길을 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록 그 아이는 가고 없지만, 부디 영화 속에 ‘소희’로 살아남아 많은 이들이 오래도록 기억하는 이름이 되길 바랐다” 정주리 감독의 의지의 결과물은, 하나의 사건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해 볼 수 있을 거라는 제작사의 기획 의도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고, 이렇게 <다음 소희>의 여정은 시작됐다.
시나리오
시나리오를 쓸 때 정주리 감독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재료들이다. 많은 이들에게 사건을 알린 SBS 시사 교양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부터 현장실습 실태를 다룬 각종 탐사보도 기사들, 현장실습 노동 현장과 교육 당국의 문제점을 다룬 토론회 영상들은 물론이고 이 사건을 최초로 보도하고 꾸준히 후속 취재를 이어간 허환주 기자의 책 [열여덟, 일터로 나가다], 현장실습생 출신인 허태준 작가의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 현장실습생 사망 사건 사고의 유가족과 친구들을 만난 이야기를 담은 은유 작가의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같은 책들이 그에게 충분한 토양이 되어주었다. 콜센터와 학교, 교육청의 환경과 업무 내용들, 그리고 그곳에서 오고 간 사실들을 분명히 알고 이해하는 것은 정주리 감독으로 하여금 그 상황에 놓인 인물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상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
트리트먼트 단계에서 이미 두 명의 주인공과 2부로 나눠진 구성, 오프닝과 엔딩 등 영화의 주요 구성이 확정되었고 제목 역시 <다음 소희>로 정해졌다. 첫 번째 주인공이 죽고 형사가 등장해 남은 절반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구성의 중심은 ‘소희’의 죽음. 그러나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어떤 죽음은 충분히 애도되지도, 말해지지도 못한 채 다음 비극을 맞는다. 그래서 정주리 감독에게는 반드시 ‘유진’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영화 속 ‘유진’이, 우리를 대신해 나서야만 했다. “‘소희’를 잃은 우리가 ‘유진’과 함께 이 고통스러운 여정을 함께하며 왜 같은 일이 반복되는지, 그렇게 ‘다음 소희’들에 관한 데까지 관객분들과 함께 질문을 이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정주리 감독에게도 역시 2부로 나뉘는 구성은 영화적으로 부담스러운 결단이었다. “이 낯선 구성을 어떻게 영화 형식 안에서 필연적인 이야기로 완성할지 고심했다. 감정의 완급을 조율하면서도 긴장을 잃지 않고 사건을 전개시켜 나가기 위해 영화적인 모든 요소를 동원하려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시나리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이었다고 정주리 감독은 말한다. “각종 요소와 구체적인 상황들을 최대한 사실적인 것들로 채우면서 그곳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타협 없이 현실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야만 영화적인 순간이 운신할 자리가 생긴다” 어떠한 과장도, 인위적인 강조도 없이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것. 정주리 감독이 말하는 영화적 순간이란 판타지에서 비롯되는 마술이나 희망으로 포착하는 찰나의 기적 같은 것이 아니라 사실에 기반한 ‘현실성’이다. 역설적으로 이 현실성은 어떤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도 관객들이 주인공들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마법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절반으로 딱 나뉘는 구성에도 불구하고 관객분들이 온전히 하나의 영화로, 아니 이 구성이어야만 온전해지는 <다음 소희>로 받아들여 주기를 바랐다” 정주리 감독은 이를 위해 2021년 1월부터 5월까지, 꼬박 5개월을 밤낮없이 매달렸다. 그리고 <다음 소희>의 시나리오를 세상에 내놓았다.
캐스팅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정주리 감독의 마음속에 ‘유진’은 이미 배우 배두나의 이미지로 확고했다. 무엇보다도 주인공 ‘소희’가 죽고 난 후, 영화의 중간에 등장해도 자신만의 아우라로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정주리 감독이 ‘유진’ 역으로 배두나를 떠올린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전작을 함께 했던 인연과 그 당시의 황홀한 기억을 넘어서서, 배두나는 이러한 엄중한 임무를 맡아 이 영화를 완성할 수 있는 내가 아는 유일한 배우다. 무엇보다 그녀가 독보적으로 표현해낼 ‘유진’의 세밀한 감정들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있었다” 정주리 감독은 시나리오를 마무리하자마자 배두나에게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배두나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도희야> 후 7년 만의 재회였다.
“정주리 감독이 시나리오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나 문체를 굉장히 좋아한다. 다루는 주제나 소재도 항상 와닿는다. 감독과 일면식이 없었던 <도희야> 때에도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하겠다고 했다. 내가 이렇게 반하는 영화는 사실 드물다. 아주 심사숙고하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민한 다음 신중하게 결정하는 편이다. 그런데 정주리 감독의 작품은 항상 시나리오를 보면 반하게 된다” 오랜만에 첫눈에 마음을 빼앗긴 시나리오였다. 배두나는 다시 한번 정주리 감독의 손을 잡기로 했다. 배두나의 망설임 없는 선택과 이유 있는 자신감은 불안과 걱정으로 흔들리던 정주리 감독에게 용기, 그리고 끝까지 밀고 나갈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단언컨대, 배두나는 나의 글을 가장 잘 알아봐 주는 사람이다. 오직 시나리오만 읽고 이 사람은 내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하고 싶은지 파악하고, 궁극적으로 만들고 싶은 영화의 모습과 본질을 꿰뚫어본다. <다음 소희>를 준비하고 촬영하고 완성하는 동안, 배두나는 나의 가장 강력한 동지였다”
배두나가 맡은 ‘유진’은 오랜 병환 끝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업무에 복귀한 경찰이다. 지칠 대로 지쳐서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다. 하물며 이제 막 이사 온 집에서 짐조차 다 풀지 못했고, 사람들 사이를 겉돈다. 배두나가 그린 ‘유진’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유진’이 사회에 많이 실망해 온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도 과거엔 ‘소희’처럼 발랄했을 수 있고, 지금과 같은 사람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살면서 많은 것에 실망하고, 포기했고, 그래서 어떤 기대가 없는 사람이랄까. 특별히 시니컬하거나 유난히 의욕 없는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 말이다” 배두나가 해석한 직업인으로서의 ‘유진’은 정주리 감독이 ‘유진’에게 투영하고자 했던 우리들의 모습을 많이 닮았다. 그렇기 때문에 배두나는 ‘유진’의 시선이 곧 관객의 시선인 것 같기도 하다고 말한다. “‘유진’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관객들에게 어필해야 한다거나, 캐릭터의 감정과 서사가 더 돋보일 수 있게 한다거나, 그런 점은 전혀 욕심내지 않았다. 오히려 ‘유진’의 전사가 부각돼서 다른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을 경계했고, 관객 중 한 명을 대표하는 마음으로 같이 분노하고, 사건을 파헤쳤다고 하는 것이 좀 더 가까울 것 같다”
극의 중반부에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 관객의 감정을 대변하는 동시에, 마지막까지 긴장과 감정을 끌고 가야 하는 인물. 이런 ‘유진’의 역할에 배두나가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사실 ‘유진’은 극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캐릭터는 아니다. 게다가 중반부에 등장해서 이야기를 되짚어가는데, 이미 관객은 모든 스토리를 알고 있다. 배우로서는 일종의 핸디캡을 갖고 시작하는 거다 보니, 연기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영화의 나머지 절반이 지루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계산해서 연기를 하기보다는 날 것의 분노, 관객들이 느낄 만한 감정을 최대한 몰입해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극의 흐름 안에서 자연스럽게 느끼고, 몰입하고, 사건을 파헤치며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게 하는 데 가장 주안점을 뒀다” 배우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긴 정주리 감독이 요청한 것은 단 하나였다. 지금까지 배우 배두나가 맡았던 모든 역할들 중, 가장 어두운 여자였으면 좋겠다는 것. 정주리 감독은 첫 촬영 날, 배두나가 일주일 동안 한숨도 못 잔 것 같은 얼굴로 ‘유진’이 되어 나타났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야말로 숨이 멎을 것 같은 순간이었다.
‘유진’과 달리 ‘소희’는 기존의 한국 영화에서 본 적 없는 참신한 얼굴이길 바랐던 정주리 감독은 엄청난 수의 오디션을 볼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소희>의 조감독이 당시 다른 작품으로 인연이 있었던 신인 배우 김시은을 소개했다. 한번 만나볼 생각으로 잡았던 첫 미팅 당일, 정주리 감독은 김시은을 ‘소희’로 낙점했다. 어떤 배우든 만나면 의례히 묻게 되는 질문인 시나리오가 어땠냐는 질문에 “‘소희’가 꼭 세상에 나왔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김시은의 대답 때문이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주 평범해 보이는 이 대답은 김시은이 이미 이야기를 엄청나게 객관화해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이 배역을 맡을지, 어떻게 잘 해낼 수 있을지를 먼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소희’가 영화로 살아남아 관객들을 만나면 좋겠다는 바람이 차분하게 그녀를 압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범하다고 느꼈다”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정주리 감독은 점차 확신했다. 애타게 찾고 있던 ‘소희’를 만난 것이 아니라, 김시은이라는 배우가 그 자리에서 ‘소희’를 보여주고 있었다.
김시은이 시나리오를 읽고 느낀 첫 감정은 안타까움 이었다. “점점 고립되는 ‘소희’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영화적으로는 ‘소희’에서 ‘유진’의 이야기로 전환되는 과정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 영화가 세상에 공개되어 많은 분들에게 전달되었으면 좋겠고, ‘소희’의 이야기를 들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김시은이 연기한 ‘소희’는 영화 속에서 가장 큰 변화를 겪는 인물이다. 춤을 좋아하고, 할 말은 하는 밝은 고등학생이었던 ‘소희’는 일을 시작하면서 점차 말수가 줄고 빛과 색을 잃는다. “‘소희’는 당차면서도 자신만의 소신을 지닌 인물이다. 그런데 콜센터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겪으며 좌절한다. 이겨내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결국은 힘을 잃게 되는 ‘소희’의 감정에, 촬영을 하며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전반부를 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부담은 신인 김시은에게 더욱 크게 다가왔다. “잘 해내지 못할까봐 불안한 마음이 들 때면 오로지 감독님을 전적으로 믿고 따라갔다. 모든 장면마다 하나하나 이야기를 나누었고, 감독님은 내가 ‘소희’로서 생각의 전환을 빠르게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셨다” 시간이 지나며 달라지는 ‘소희’의 감정 변화를 눈에 띄게 표현하기 위해 김시은은 외적으로도 공들였다. “처음에는 얼굴에 베이스 정도를 바르고 촬영했다. 그러다 나중에는 화장기 없이, 립밤도 바르지 않은 채 모니터 앞에 나섰다. 가장 신경 쓴 것은 ‘소희’의 콜센터 상담 말투였다.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는 어색한 말투지만, 시간이 흐르며 점점 익숙해지고 나중에는 마치 로봇같아진다. 이를 위해 영상이나 기사를 찾아보기도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길거리를 걸으며, 자기 전, 눈 뜨자마자 등 일상생활에서도 입에 붙도록 수백 번씩 연습하고 익혀나갔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정주리 감독은 신인인 김시은과 호흡을 맞추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김시은은 시나리오를 파악하는 기본적인 것은 물론이고, ‘소희’가 겪어내는 감정의 파고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세밀한 표현들에 대한 완급조절이 수준급이었다. 게다가 이제 막 연기를 시작한 친구라는 것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전체 속에서 지금 자신과 장면의 위치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첫날 만났을 때 느꼈던 그 비범함이 정확했다”
정주리 감독은 ‘소희’에 대한 궁금함과 최대한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어 나갔다고 밝혔다. 연출자인 감독도, 영화를 보는 관객도 끝내 알 수 없었을 ‘소희’의 마음. 그 마음에 가장 가까이 다다라 보았을 김시은은 ‘소희’를 대신해 꿈을 꿨다. “만약 ‘소희’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유진’처럼 경찰을 꿈꾸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런 정의로운 일을 하고 싶어 했을 것 같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됐을 것 같다”
한편, 배두나와 김시은을 비롯해 한국 영화를 떠받치고 있는 베테랑 연기파 배우들과, 신선한 활기를 불어넣으며 새로이 발견된 얼굴들 역시 <다음 소희>를 빛낸다. 먼저 콜센터에 새로 부임하는 ‘이보람 팀장’ 역으로는 연극과 드라마, 영화를 넘나들며 활발한 활약을 펼쳐 국내 관객에게는 너무나 낯익을 연기파 배우 최희진이 분했다. 정주리 감독은 ‘이보람 팀장’은 최희진을 염두에 두고 만든 캐릭터라고 밝히며 “이제껏 다른 작품에서는 보여준 적 없는, 어쩌면 최희진 배우가 주로 맡아왔던 역할과는 정반대인 캐릭터다. 무조건 잘 해낼 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기대 이상이었다. 특히 새 팀장과 ‘소희’가 부딪히는 장면은 촬영장에서도 모두를 놀라게 했다”라고 촬영 비하인드를 전했다.
<다음 소희>인 만큼, ‘소희’의 친구와 동료들 역시 무척 중요했다. 각 개인이 고유한 개성을 지닌 인물임과 동시에, 다른 많은 아이들로도 확장할 여지를 열어둘 수 있어야 했다. 정주리 감독은 영화를 준비하며 얻었던 정보들을 통해 ‘소희’의 주변 친구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힘든 노동의 현장에서 아무것도 보호받지 못한 채로 아이들이 일을 하고 있다. 영화 속에 최대한 이러한 현실을 담으려 했다. 한편으로는 보통의 삶 아주 가까이에 노상 있었던 현실이라는 것도 드러나길 바랐다” 그렇게 ‘소희’의 친구들은 주차장 안내원이 되었고, 택배기사가 되었다.
그중 ‘소희’의 가장 친한 친구인 ‘쭈니’ 역에는 신예 정회린이 열연을 펼쳤다. 실제로 전주에서 나고 자랐다는 정회린은 모델 출신의 연기자로, <다음 소희>로 본격적인 영화 연기를 시작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영화 <이어지는 땅>과 화제의 TVING 시리즈 [몸값]에도 출연해 눈도장을 찍었다. “정회린 배우와 만나 ‘쭈니’의 라이브 방송 장면을 함께 읽어보는데, 능숙하지 않은, 이제 막 시작해 들뜬 초보 BJ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예뻤다. 연기를 처음 하는 만큼 낯설고 어려운 점도 있었겠지만, 언제나 진짜 감정으로 현장에 임했고 회차를 거듭할수록 놀라운 속도로 발전해갔다”
가장 난항을 겪었던 배역은 ‘소희’의 선배 ‘태준’이었다. 수준급의 춤 솜씨는 물론이고, 깊이 있는 감정 연기까지 요구되는 까다로운 역할이었다. 오디션 영상을 받아보고 실제로 많은 배우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정주리 감독이 원하는 ‘태준’은 없었다. 그러던 중, 오디션 영상을 보고 일찌감치 제외되었던 배우 강현오가 다시 영상을 보내왔다. “아이돌 데뷔를 준비했었기 때문에 춤을 아주 잘 췄고, 모델 활동도 오래 해서 외모 역시 ‘태준’ 역에 적합한 친구였지만 연기를 해본 적이 없어 아쉬웠다. 그런데 새로 보내온 영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연기가 아주 좋아져 있었다” 달라진 모습을 본 정주리 감독은 그와 만났고, 그동안 열심히 연습했다는 고백을 전한 강현오를 캐스팅했다. 그리고 이에 보답하듯 강현오는 체중을 엄청나게 감량하고, 역에 맞게 현장에서 삭발을 하는 등 피나는 노력을 보여주며 마지막 장면에서 커다란 울림을 전하는 완전한 ‘태준’이 되었다.
그 밖에도 콜센터 팀장 ‘이준호’ 역은 <변호인>, <암살>, <사자> 등 굵직한 작품들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배우 심희섭이 맡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장학사’ 역으로는 연극과 드라마, 영화에서 잔뼈 굵은 베테랑 배우 황정민이 열연했다. 또한, 수많은 드라마를 통해 얼굴을 비추고 있는 실력파 허정도, 한국 독립 영화에서 주목하는 배우 권다함, 김우겸 등이 크고 작은 역할로 분해 영화의 곳곳을 빈틈없이 채웠다. 정주리 감독은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 선정 소감을 통해 영화를 빛내준 배우들을 향한 각별한 감사와 자랑스러운 진심을 표했다. “지난 겨울, 온 스태프와 배우들이 한마음으로 촬영한 영화를 찬란한 봄날 공개할 수 있게 되어 고맙다. 여기 보석 같은 배우들을, 세계의 관객들에게 자신 있게 소개한다!”
연출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정주리 감독은 최대한 촘촘하게, 많은 것을 미리 준비했다. 전체 분량의 콘티를 완성했고 거의 모든 로케이션을 정해 두었다. 무조건 생길 수밖에 없는 변수에도 곧바로 대처할 수 있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준비였다. 이러한 준비에는 현장에서 촬영하는 장면을 여유 있게, 맨눈으로 마주하고 싶다는 정주리 감독의 소망이 담겨 있었다. “현장에서는 최대한 여유를 갖고 배우들이 씬 전체를 호흡하며 연기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다. 정해진 컷에서 끝내지 않고 배우의 호흡과 감정에 따라 씬 전체를 한 호흡으로 찍는 경우가 많았다. 촬영팀, 조명팀 등 모든 스태프들은 이렇게 예기치 않게 길게 찍는 상황에 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곳곳에서 생겨난 마법의 순간들은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다”
모든 파트에서 원칙으로 작용했던 것은 ‘표현은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로 인해 담기는 감정은 최대한 현실적으로’였다. 정주리 감독의 한국예술종합학교 동기이자 <엑시트>, <기억의 밤>, <장산범> 등을 작업한 김일연 촬영감독과 함께, 정주리 감독은 2부로 나뉘는 구성을 <다음 소희>만의 스타일로 담아내기 위해 치열한 고민을 거쳤다. 그 결과, 1부에서는 핸드헬드 카메라워킹으로 ‘소희’를 따라가고, 2부에서는 최대한 정적인 픽스 카메라로 화면 안에서 움직이는 ‘유진’을 담기로 하는 큰 틀이 잡혔다. “‘소희’ 뒤에서 밀착하여 시작했던 카메라가 극이 진행될수록 그녀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저수지에서 정점에 달한다. 그리고 더 이상 ‘소희’를 따르지 않고 멈춘 채 마지막을 지켜본다. 그렇게 가장 멀어져 정지해버린 화면으로 ‘유진’이 등장하도록 구성했다. 그리고 멀리서 ‘유진’을 담기 시작했던 카메라 이후, 그녀의 내면 변화에 따라 점점 가까워지거나 따르도록 했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처음의 ‘소희’를 담았던 카메라처럼 ‘유진’에게 가장 가까워져 있다. 그렇게 영화 속에서 단 한번 마주쳤을 뿐인 ‘소희’와 ‘유진’이 각기 다른 시간 속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영화 전체의 구성과 스타일을 완성했다”
인물들의 감정을 따라가는 촬영과는 달리, <다음 소희>의 빛은 인물들로부터 거리를 둔 것 같은 차가운 무채색에 가깝다. “모노톤의 차갑고 황량한 느낌이 나는 색조와 겨울의 빛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영화 속에서 ‘소희’가 점점 빛을 잃어가는 과정을 최대한 화면으로도 보여주고 싶었다. 이것이 이 영화의 감정을 가장 현실적으로 다루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감정을 최우선으로 한 빛의 설계는 2부에서 역시 이어진다. “차갑다 못해 얼어버린 저수지로 ‘유진’이 처음 등장할 때, 화면은 1부에서보다 더욱 심화되어 있다. ‘소희’와 ‘유진’이 각각 마지막에 마주하게 되는 한 줄기 빛이, 그 대비로 인해 남다른 정서를 전하기를 바랐다”
영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공간인 콜센터는 실제 콜센터를 빌린 것이 아니라 미술팀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노력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빈 공장 건물에 세트를 지어 촬영했다. 무수한 레퍼런스를 바탕으로 사실적으로 구성하되, 곳곳의 디테일은 미술감독님이 영화적으로 표현해냈다. 콜센터 전체를 지배하는 밀도와 압도하는 현황판, 플래카드 등의 텍스트 자료들, 파티션 안의 갑갑한 표현 등은 모두 몇 날 며칠 밤새워 가며 미술팀이 맨손으로 일궈낸 업적이다” 정주리 감독은 콜센터 촬영을 모두 마치고 세트를 철거하던 때 만감이 교차하던 순간을 여전히 잊을 수 없다. 그 밖에도 소희의 집과 유진의 집, 가맥집, 학교, 교육청 등 다른 많은 실내 공간들은 가장 근접한 로케이션을 찾아 미술팀의 섬세한 터치를 녹였고, 이는 영화 속 캐릭터들이 실재하는 하나의 인물로서 관객과 호흡하고 서있을 수 있게 하는 단단한 지반이 되어주었다.
현실을 가장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 강박적이리만치 타협하지 않는 정주리 감독의 태도는 음악에서 역시 드러난다. “처음부터 음악감독님과는 음악을 최소화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음악은 어쩔 수 없이 감정을 북돋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관객이 ‘소희’에게 어느 정도의 거리를 갖고 보게 하려면 최대한 피해야 했다. 있는 그대로, 관객의 내면에서 스스로 일어나는 감정이어야만 마지막까지 영화와 함께 할 수 있게 만든다고 믿었다. 다만 몇몇 순간에, 감독으로서 내가 ‘소희’와 ‘유진’을 위로하고 싶은 순간에만 음악을 사용했다”
가장 중요한 공간인 저수지는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정주리 감독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이미지가 있었다. 산속에 고립된 아주 높은 곳으로 한참을 올라가야 나타나고, 밤에 되면 불빛 하나 없는 암흑이 되는 곳. 프리 단계에 들어가기 전, 우연히 인터넷에서 경남 거창의 저수지 사진을 하나 만난 정주리 감독은 그 길로 거창으로 내려갔다. 머릿속으로 그려보기만 했던 ‘소희’의 마지막 순간이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촬영에 적합하지 않은 공간이었고, 연출제작팀은 수많은 저수지를 찾아다녔다. 대부분의 저수지는 흘러내린 물을 가둬야 하기 때문에 낮은 지대에 자리해 있었고, 대부분 유원지처럼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꾸려져 있었다. 간과한 사실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높은 곳에 위치한 저수지는 한겨울에 반드시 얼어버린다는 것이었다. 전국 팔도를 돌며 ‘소희’의 마지막을 담을 저수지를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그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정주리 감독과 제작팀은 위험을 무릅쓰고 처음으로 돌아갔다. “2월 27일, 28일에 저수지 장면을 찍기로 하고 거창의 저수지로 확정했다. 예년의 데이터는 그 시기에 반드시 저수지가 얼어 있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마지막 촬영에 이르렀을 때, 역시나 저수지는 절반 정도가 얼어있었다. 하지만 녹고 있는 중이었고, 촬영하는 날에는 조금 더 녹아 CG로 후반 단계에서 지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소희’의 저수지 장면을 먼저 찍고, 다음 날 ‘유진’의 저수지를 촬영했는데 그때는 좀 더 녹아 있어 각각의 느낌을 살려 촬영할 수 있었다”
한편 춤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마주한 두 주인공은 그 시각, 연습실에 있었다. 춤을 매개로 스치는 두 사람의 장면을 위해 배두나와 김시은은 촬영에 들어가기 두어 달 전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안무 선생님을 만나 연습에 매진했다. “정주리 감독이 연습실이 있다고 해서 갔는데, 힙합을 추라고 했다. 잘 춰야 하는지 묻자, ‘유진’은 춤을 좋아하고 배우기까지 했으니 어느 정도는 췄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길로 힙합댄스의 세계에 들어선 배두나는 꾸준히 연습했고 마침내 군무의 중심에 선 채 능숙한 춤을 선보일 수 있게 됐다. 정주리 감독은 자신을 좀처럼 잘 드러내지 않고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는 ‘유진’이 사람들과 어울려 춤을 춘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을 통해 ‘유진’이라는 인물의 복잡함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전한다.
김시은은 ‘소희’가 춤을 춘다는 설정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누구나 좋아하는 게 하나쯤은 있지 않나. ‘소희’는 그게 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세 번은 춤 연습을 했다. 개인 연습도 열심히 하면서 더 열심히 배우고 춤췄다” 그런데 왜, 춤이어야 했을까. 정주리 감독은 춤이야말로 가장 영화적인 표현을 할 수 있는 요소라고 말한다. “거듭하며 온몸을 움직여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 말을 하지 않고 현재의 간절한 바람을 몸짓에 담는 모습. 화면 안에서 누군가 춤을 추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단번에 요동하는 에너지가 전달된다. 거기에 틀린 부분을 반복하여 연습하는 모습, 끝내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안타까움을 깊이 각인하고 싶었다”
실제로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을 장식하는 ‘소희’의 춤은 현장실습을 나갔던 고등학생이라는 뭉뚱그려진 익명을 한 명의 개인으로 구체화한다. 그렇게 붙여진 이름은 더 이상 우리가 모르는 실패한 아이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다음에도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갈 그 아이의 것이다. “영화를 처음 구상했던 때 계속해서 틀리는 춤을 반복하는 것으로 시작해 마침내 이를 성공하고 기뻐하는 오프닝과 엔딩을 생각했다. 뭔가 화려하고 멋지고 굉장한 것이 아닌, 마지막 그 턴 한 번까지를 해내는 것. 그런 성취감을 느끼길 바랐다. 영화 내내 그녀에게 닥친 비극에 마음이 아프지만, 그녀 자신은 언젠가 그런 성취감을 느꼈기를. 그것이 언제였을지라도. 한편으로는 영화 내내 아무런 잘못 없이 고초를 겪은 ‘유진’에게 ‘소희’가 남긴 선물이 되길 바랐다. 무너져 내린 ‘유진’의 마음을 ‘소희’가 위로해 주는 것이길. 마침내 두 사람이 그렇게 서로만이 아는 방식으로 마주하고 있기를”
정주리 감독은 섣부른 의도나 정치적 메시지를 건네는 대신 계속해서 묻는다. 왜 고등학생이 일에 능숙한 성인도 감당하기 힘든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는가. 왜 학교는 아이들을 그곳으로 보내는가. 왜 이런 일은 자꾸만 반복되는가. 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슬퍼하기만 하는가. 정말로, 우리는, 나는 이 모든 일들과 상관없는가. 이 모든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은 고통스러웠고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정주리 감독은 평범한 우리들이라면 ‘유진’이 그러는 것처럼 함께 가슴 아파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끝내 닥치는 무력감이야말로 오늘과는 다른 ‘다음’을 기약하게 만드는 희망이 되리라는 것을 믿는다.
“<다음 소희>는 어떻게 하여 가장 취약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혼자서 죽어가는지를 생각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화재현장에 고립된 소방관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불길과 연기 속에 갇힌 그는 동료가 와서 구해주지 않으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다. 불길과 연기 밖에서는 그가 보이지 않고, 아무리 소리쳐도 들리지 않는다. “고립된 사람에게 다른 이가 다가오지 않으면, 그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김훈, [라면을 끓이며] 발췌) 스스로 생을 접는 많은 이들의 상황이 이와 비슷한 것 같다. 누군가 다가갈 수 있다면, 어느 순간 어느 곳에서 간절히 보내고 있었을 그 구조 신호를 지나치지 않는 누군가가 있다면, 어쩌면 달라질 수도 있다는 희망. 오직 그 희망을 생각해 보며 이 영화를 만들었다”
[ EPILOGUE ]
“
나는 영화의 힘을 믿습니다.
비록 허구의 인물, 허구의 이야기가 될지라도
영화가 진실을 담으면 관객들의 마음속에 살아간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스스로의 길을 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그 아이는 가고 없지만 부디 영화 속에 소희로 살아남아
많은 이들이 오래도록 기억하는 이름이 되길 바랐습니다.
”
-정주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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